옹정제(雍正帝, 1678년 12월 13일(음력 10월 30일) ~ 1735년 10월 8일(음력 8월 22일))는 청나라의 제5대 황제(재위 1722년 ~ 1735년)이다. 성과 휘는 아이신 교로 인전(愛新覺羅胤禛, 만주어: 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ᡳᠨ ᠵᡝᠨ Aisin Gioro In Jen), 묘호는 세종(世宗, 만주어: ᡧᡳᡯᡠᠩ Šidzung), 시호는 경천창운건중표정문무영명관인신의예성대효지성헌황제(敬天昌運建中表正文武英明寬仁信毅睿聖大孝至誠憲皇帝), 짧은 시호로는 헌황제(憲皇帝, 만주어: ᡨᡝᠮᡤᡝᡨᡠᠯᡝᡥᡝ ᡥᡡᠸᠠᠩᡩᡳ Temgetulehe Hūwangdi)이며, 연호는 옹정(雍正, ᡥᡡᠸᠠᠯᡳᠶᠠᠰᡠᠨ ᡨᠣᠪ Hūwaliyasun Tob, ᠨᠢᠶᠢᠷᠠᠯᠲᠤ ᠲᠥᠪ Nayiraltu Töb)이다. 제3대 황제인 강희제의 넷째 아들이며[1] 강희제의 후궁 출신인 효공인황후 우야씨(孝恭仁皇后 烏雅氏)의 소생이다. 아버지처럼 치밀하면서 그에 더해 성실하기까지 한 성격으로 이미 황자인 옹친왕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정치적 세력을 모으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8황자 윤스, 9황자 윤탕, 10황자 윤오(允䄉, 만주어: ᠶᡡᠨ ᠣ Yūn O), 14황자 윤티(允禟, 만주어: ᠶᡡᠨ ᡨᡳ Yūn Ti) 등과 정치적으로 크게 대결하였다. 1722년(강희 61년)에 부황 강희제가 붕어하자 창춘원에 감금하고 강희제의 고명대신인 장정옥·롱코도 등의 추대를 받아 황제에 오른다. 13년의 짧은 치세였으나 그의 정책으로 청 제국은 강희제 말기 약간 부실하던 황권을 다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특히 황실의 안정과 강력한 황권을 수립하기 위해 과거 황위를 놓고 다툰 형제들은 죽이거나 감금하는 등 철저히 배제하고 대신들과 정사를 의논하였다. 그의 정책으로 국가는 더욱 안정이 되었고 내실 역시 튼튼해졌다. 또한 재정 개혁을 통하여 기강 단속과 재정 정비를 일거에 실행하는 정책을 추진함과 더불어 조세 제도 자체에도 개혁을 단행했다. 또한 군기처를 세우고 황권을 더욱 강화, 재상들의 정치 발언권을 규제하였고 재상들의 정치 참여를 규제한 대신 자신에겐 재상들이 본래 결재하던 문서의 양까지 합하여 어마어마하게 많은 양의 문서를 검토, 이에 일일이 답하였고 하급의 지방관이라도 자신에게 상소를 올리면 이 역시 받아주어 주필로 써서 보내주어서 명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재상들과 대신들을 군기대신으로 삼고 같이 정사를 의논하였으나 이미 그들의 권세는 명나라 때의 대신들인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에 비하여 크게 축소되어 있었기에 신권은 크게 위축되었다. 강희제 때 일어난 문자의 옥을 다시 대대적으로 실시하여 청 제국의 정통성에 반대하는 학자들과 한족을 엄정히 다스렸으며 지방관들에 대한 철저한 감시로 부정부패를 크게 줄였다. 강희제가 죽은 직후 군사를 동원하여 황제에 올랐기 때문에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서 황위를 찬탈한 권력지향적 독재자라는 평판도 있지만 지칠 줄 모르고 늦은 밤까지 정치에 몰두한 훌륭한 군주라는 평가도 동시에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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